이야기
복음나누기
시련의 의미 –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2월 5일 /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히브 12,4-7.11-15 / 복음 : 마르 6,1-6
오늘 독서 말씀의 주제는 시련과 인내입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히브 12,5-7)
오늘은 히브리서 말씀 중에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히브 12,7) 중심으로 보고자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시련들은 사랑하는 자녀인 신앙인을 훈육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현인들은 잠언 3장에서 이렇게 전해줍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교훈을 물리치지 말고 그분의 훈계를 언짢게 여기지 마라.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 3.1-12)고 가르쳤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에게도 유효하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인을 잘 가르쳐 이들이 성숙한 신앙에 이르기를 바라시는데, 이때 이들을 훈육하시는 수단이 바로 시련이다. 그러니 시련이 닥치면 하느님을 원망할 게 아니라, 그분께 더욱 순종하여 생명을 얻어야 한다. 하느님은 신앙인을 미워해서 시련을 허락하신 게 아니라, 그들을 자녀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교부 대 바실리우스는 주님의 훈육을 영광의 길로 이끌어 주는 시련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오히려 득이 됩니다.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고 체력을 단련한 운동선수들이 대를 물려 가며 영광을 차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헐뜯고 중상하면 좋은 말로 답해 주고, 나쁘게 대하면 오히려 고맙다고 해주고, 박해하면 견디어 내며 기뻐하십시오(1코린 4,12-13 참조). 좋은 일에만 축복의 말을 해 주고, 어렵고 우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아무 말 않고 모른 척한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그런 때일수록 더욱 축복의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시련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시련이 아닐 것입니다.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련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교회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고전 준주성범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제12장 역경의 이로움 편입니다.
가끔은 시련과 역경을 당하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역경은 우리가 귀양살이 중에 있다는 것과 세속 일에 희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 때문에, 혹은 잘못한 일이 없고 잘못 생각한 게 없는데도 남이 우리를 잘못 판단하는 경우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이러한 괴로움 역시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런 일은 겸손한 마음을 발하게 하고, 허영심을 드러낼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천하게 생각하고, 겉모습만을 보고 신뢰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히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을 더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느님께만 온전히 의탁하여 사람들이 주는 위안을 찾을 필요가 없도록 해야만 한다. 선한 뜻을 지닌 사람이 괴로움이나 시련을 당하거나 악한 생각으로 괴롭게 되면, 하느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자기에게 필요한가를 깨닫게 되고, 하느님 없이는 사소한 선 이라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는 완전하고 충만한 평화와 안전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준주성범에서는 시련을 통해 하느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신앙은 시련을 겪는다고 전해줍니다. 164-165항입니다.
164항 한편 지금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며”(2코린 5,7),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1코린 13,12) 하느님을 알 뿐이다. 우리가 믿는 그분께서 신앙을 비춰 주신다 해도 우리의 신앙은 종종 어둠 속을 지나기도 한다. 신앙은 시련에 처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흔히, 신앙이 우리에게 보장해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한다. 악과 고통, 불의와 죽음의 경험은 ‘기쁜 소식’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며, 때로 신앙을 흔들기도 하고, 유혹이 될 수도 있다.
165항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증인들, 곧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믿은 아브라함, “신앙의 나그넷길에서”(41)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그 무덤의 어둠을 함께함으로써(42) “신앙의 어두운 밤”(43)에까지 도달하였던 동정 마리아와 그 외의 많은 신앙의 증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의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1-2).
교리서에서는 아브라함, 동정 마리아와 많은 신앙의 증인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권해줍니다.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이 배척하는 표지가 아니라 그분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받는 표지입니다. 하느님은 때때로 시련을 주어 당신 백성을 교육하고 파국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인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시련은 주어질 것입니다. 시련을 대하면서 불평 불만으로 대할지 주님의 훈육으로 대할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시련이 다가오면 불평 불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련의 시기에 오히려 주님께 더 의지하고 희망을 두는 시기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집회서 2장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집회 2,3)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집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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