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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나누기

말씀을 전하였다 –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작성자
하느님의 사랑

작성일
2025-05-07 09:06

조회
157

 

5월 7일 /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사도 8,1ㄴ-8 / 복음 : 요한 6,35-40

 

스테파노가 설교하고 순교한 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들만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박해를 받았는데, 이제는 교회 공동체 전체가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구체적인 모습을 보면, 필리포스는 그리스도를 선포하였고, 더러운 영들이 나갔고, 많은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흩어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파견 하셨을 때의 제자들의 사명 수행의 모습과 같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말씀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 모습은 또 한국천주교회사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신유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은 산간벽지로 흩어져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2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이 모습 그대로 사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지식적인 것을 전한 것이 아니라, 체험한 하느님을 전하셨고, 그 힘을 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의 흩어진 그리스도인과 연결되는 구체적으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삶과 신앙을 보려고 합니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 새터에서 태어났습니다. 1836년 16살 되던 해에 경기도 과천의 수리산에서 모방 신부님께 선택되어 마카오에 유학하였습니다. 1844년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의 서가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그해 12월에 귀국하였습니다.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의 일입니다. 이후 배티를 중심으로 5개도를 관할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사목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쓴 편지에 보면, 그분의 사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조선에 들어온 뒤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7월 한 달 동 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천 리를 걸어다녔습니다.”(최양업 신부의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님의 모습을 본 페롱 권 신부님의 편지에서도 사목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하루에 80리에서 100리를 걸어야 했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 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1861년 7월 26일, 페롱 권 신부의 편지에서).

 

1849년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압록강을 건너 귀국에 성공합니다. 용인 한덕골과 진천 동골에 살던 동생들을 만난 그는 곧 신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11년 6개월 동안 걸을 수 있는 날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5개도 127개 공소를 돌아다니며 사목을 합니다. 그가 한 해에 만난 신자는 5천 명 정도로 당시 이 땅의 신자 가운데 절반이나 되었고, 어느 해에는 240명에게 세례성사를, 4천여 명의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기도 했습니다.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내는가 하면, 외국 선교사의 입국을 주선하거나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고, 스승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 교회의 사정을 알리는 등 지칠 줄 모르게 활동하였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틈틈이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거나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한 것도 그의 업적입니다.

 

사목지역이 넓고 외교인의 탄압이 그치지 않아 고난은 계속되었지만 최양업 신부님은 순교자의 자세로 그것을 달게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전교길에 당하는 위험에서 항상 하느님의 보호를 믿었습니다. 1851년에 그는 선교사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포졸들이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공소 방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아무일 없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전교길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만일 필요하다면 피를 흘릴” 각오로 교우촌을 찾아다녔으며, “비참하게 지내는 민초들을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함 때문에 가슴을 앓기도 했습니다. 한 해 1천여 명의 예비 신자를 기록함으로써 전교활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경신박해(1860년)를 만나 죽림굴(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서 숨어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순교를 각오하고 9월 3일에 마지막 편지를 썼 습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인사가 될 듯합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박해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박해 때문에 밀린 공소사목에 더 열심하던 최양업 신부는 경북 문경에서 과로로 장티푸스에 걸린 지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1861년 6월 15일, 그의 나이 마흔하나. 그는 지금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며 배론에 묻혀있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최 신부의 순직 소식을 전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토마스 최양업 신부는 신덕이 굳고 전교 실적이 놀라우며 심지가 무던하여 우리 교회의 기둥이요 자랑이었습니다.”

최양업 신부. 이 땅의 두 번째 사제로, 복음화의 선구자로, 토착화를 위한 열 정으로 살아낸 장엄한 생애. 그는 길 위의 목자이며, 땀의 순교자입니다.

(최양업 신부의 삶의 흔적을 찾아-길 위의 목자, 땀의 순교자, 김민수, 경향잡지 2004년 9월호, 44-49)

 

오늘 사도 행전 말씀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를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그스도인들에게만, 신유박해 선조들에게만,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에게만 남겨두어야 될까요? 피정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을 때, 우리에게도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깨닫게 된 하느님을 내 안에만 가둬두지 마시고,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처럼,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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