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가해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루카 20,27-40)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찬미예수님!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에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또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부활의 영광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 때 신앙의 신비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매일 부활을 갈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활한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까지 죽었다가 자기 혼자 되살아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알려주시는 부활한 뒤의 삶이라면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한 적이 없지만, 그분께서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십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 말씀을 우리는 깊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습니다.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들고 시집가지 않는다.’ 이 말씀은 곧 부활한 뒤에는 장가들고 시집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왜 장가들고 시집을 갑니까? 물론 교과서적인 답변으로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되었지만 사실 둘은 같은 몸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장가들고 시집가는 이유는 이러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이들은 이미 창조주와 이러한 일치를 이루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으로 일치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육신의 생명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실은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잃어 죽게 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동참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 직접적으로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전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한계가 있는 삶은 언젠가 끝나야 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 안에 영원한 것을 담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의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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