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겸손하게 하느님께 협조하는 우리 신앙인의 삶

작성자
수도회

작성일
2012-01-02 10:26

조회
1126

나해 주님 공현 전 월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1요한 2,22-28  복음 : 요한 1,19-28

 

 

겸손하게 하느님께 협조하는 우리 신앙인의 삶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요한 1,19-20 참조). 이는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대답이라고 다소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보면 세례자 요한이 매우 겸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종말에 올,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통치되고 압제되던 시기에는 로마의 핍박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그런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리하여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던 시기에는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매우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이 갑자기 나타나서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 권위와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무척이나 많았다고 합니다. 곧,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던 그 당시 시대 상황 안에서 ‘혹시 그가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기대감 때문에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과 집중을 한 몸에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로 칭송받아 엄청난 명예와 인기를 누리고자 하는 유혹들을 매우 심하게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런 유혹들을 당당히 물리치고, 자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곧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서슴없이 겸손하게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요한 1,27 참조). 정말 대단한 겸손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 세례자 요한은 그토록 겸손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과의 꾸준한 관계로 말미암아, 곧 기도의 힘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드높아지려는 욕망과 이기심을 버리고,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그 기도의 힘으로 자신이 구세주가 아니라, 자신은 다만 주님의 길을 준비하여 주님의 구원사업이 잘 이루어지도록 협조하는 존재임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토록 겸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구업사업에 협조하는 이 사명은 세례자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모두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구세주가 아니라 구세주의 구원사업에 협조하는 협조자입니다.

그렇다면 그 협조는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그 협조의 방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요한 1,27 참조)라고 고백했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과 바로 이어지는 요한복음 1장 30절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직접 뵙고서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즉, 세례자 요한은 내가 그리스도라고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바로 저분이십니다! 라고 그리스도를 가리켰던 것입니다. 이 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 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의 역할로서,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협조하는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께 협조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협조의 역할이 신앙인의 역할로서 곧, 자신을 통해서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에 빠져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드러나시도록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 그 자체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초세기 교회의 교부였던 바실리오 성인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성인성녀들이 이와 같이 하느님께 협조하는 삶을 충실하게 사셨던 분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이러한 협조의 삶을 살고 있는지 곰곰이 돌이켜봅시다. 우리는 과연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겸손한 협조자가 되려고 하는지, 아니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이 구세주처럼 행동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가족과의 관계에서,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본당 단체와 여러 모임들 안에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과 편의 때문에 하느님을 드러내기 보다는 마치 자신이 구세주인 냥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뜻만 고집하고 관철시키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해봅시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을 따르는 기도의 힘으로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을 버리고,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드러냄으로써, 겸손되이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준비하고 협조하는 커다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일상의 작은 삶에서부터, 가까운 가족과 이웃들과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부터, 하느님을 따르는 기도의 힘으로 자신의 이기심과 잘못된 욕심을 비워서, 자기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진정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곧 하느님께 협조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 하느님의 뜻은 다름 아닌, 우리가 이미 일상의 삶에서 이웃들과 서로 나누고 있는 사랑과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친절과 배려와, 용서와 선행, 감사와 나눔 등의 온갖 선하고 참된 것들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하느님의 뜻들이 여러분들의 일상의 작은 삶을 통하여, 즉 여러분들 자신을 통하여 이웃들에게 있는 그대로 선포되어, 너와 나 우리 모두 안에서 그분의 뜻이 더욱더 깊고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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