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작성자
수도회

작성일
2012-01-02 18:20

조회
1115

나해 주의 공현 전 화요일

 

독서: 1요한 2,29-3,6 복음 : 요한1,29-34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너무도 기쁜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자녀에게 하시듯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헌신하시는 부모님들처럼 하느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은 호세아서 11장 1절의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라는 말씀처럼 어렵고 궁색한 처지에 있던 이스라엘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이집트에서 불러내어 새로운 약속의 땅을 주신 것과 같이 지금 우리를 불신과 미움이 가득 찬 세상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품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떠한 공로를 쌓아서 얻은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재물을 주고 산 것도 아니며, 더욱이 우리가 잘 해서 받은 상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됨의 특권은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것은 오늘 독서에서도 알려 주고 있듯이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느님의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살펴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마음으로부터 깊은 찬사를 드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에 가득 찬 어마어마한 칭호인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그러한 칭호를 예수님께 사용했을 때 무슨 생각을 가지고 불렀을까?

 

요한은 출애굽기 12장 11절 이하에서 나오는 빠스카의 어린 양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는 그 절기로 보아 유다인들의 과월절 준비 기간이었고, 그 축일을 지내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들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옛날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때 그들은 살해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죽음과 파멸에서 구원받았듯이,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될 어린 양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0,14) 함으로써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분으로 보는 것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본시 신분이 제사장의 아들이었기에 성전에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조석으로 끊임없이 희생되는 어린 양들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각과 마음이 없는 양이 아니라 영원하고 참된 제물로 장차 예수님께서 희생되실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53장 7절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하고 장차 오실 메시아가 당할 수난의 모습을 예언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을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 안에서 보고 그분이 가시고 있고 앞으로 가시게 될 모습을 설명해 준 것이 ‘하느님의 어린 양’의 표현입니다.

 

‘어린 양’하면 우리들에게는 순하고 연약하고 무기력하게 들리지만 성경에 나타난 ‘어린 양’의 모습은 저항하지 않고 죽음까지도 말없이 받아들이시며 희생되는 제물인 동시에 하느님의 전사의 모습으로 묵시록에서는 29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친척 사이에 누구인지 몰랐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며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서 희생되실 것임을 계시로써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요한처럼 보다 더 잘 알아 다른 이들에게 증언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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