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들나셨는가?
나해 주님 세례 축일
독서:이사 42,1-4; 6-7 복음:마르 1,7-11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셨는가?
오늘은 성탄 시기의 마지막 날인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교회는 성탄 8부 축제를 지내고, 주님 공현 대축일과 주님 세례 축일을 지냄으로서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 시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셨기에, 오늘 축일은 어제의 주님 공현 대축일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곧, ‘예수님께서 세상에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드러나셨는가?’에 관한 주제로 이 두 축일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먼저, 어제 주님 공현 대축일에 주님께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까? 동방 박사들 앞에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운 모습으로 드러나셨지요(루카 2,7 참조). 구유는 가축의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을 말합니다. 그 더럽고 지저분한 구유 위에서 포대기 하나 감싸고 우리 앞에 드러나셨습니다. 참으로 비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처음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께서, 지극히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드러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 세례 축일 복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몸소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라고 말했지요. 다른 사람의 신발 끈을 풀어주고 매어주는 행위는 누가 하는 행위입니까? 몸종들이나 하는 행위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행위는 일반적으로 몸종들이 하는 비천한 행위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말은 몸종보다도 훨씬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례자 요한에게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 낮은 자세로 세례를 받으십니다. 자신의 몸종보다도 훨씬 못하다는 이에게 도리어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할 큰 능력을 지니신 분께서 자신의 몸종보다도 훨씬 못하다는 이에게 머리를 숙여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무척이나 겸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더더욱 겸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이런 비천하고 낮고 겸손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구유에 오시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박의박식하시며, 손수 험한 목수일을 하시며 생계를 유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에게 깊숙이 내려가시어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깊이 사귀셨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 함께 어울리시고 깊게 사귀셨던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까? 세리와 창녀와 과부들이었지요. 이들은 가난하고 비천하며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모욕을 받던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눈먼 자, 벙어리 등 병들고 장애를 지닌 나약한 자들, 그리고 억눌리고 더러운 영이 들린 매우 나약하고 비천한 이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몸소 그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제1독서 이사 42,7 참조). 또한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며 희노애락을 같이 했던 그분의 제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하던 매우 가난한 어부들이었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낮은 데로 깊숙이 내려가시어 지극히 낮고 비천하고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시고 사귀시며 그들의 동무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이 다가올 무렵, 팔을 걷어붙이시고 머리를 숙이시어 낮은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닦아주셨으며, 십자가형이 선고되자 사람들로부터 온갖 욕설과 천대, 모욕과 침 뱉음과 폭행을 당하시면서 까지 꿋꿋이 십자가를 지시고 사형장으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까지 그렇게 지극히 겸손하고 비천하게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지극히 자신을 낮추시어, 비천하고 겸손하게 낮은 데로 내려가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 결말은 어떠했습니까? 그분께서는 살아생전에는 한평생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그 무한한 기쁨과 평화를 얻어 누리셨으며, 돌아가셔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고, 승천하시어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무한히 들어 높여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그 선하신 뜻에 따라 낮고 비천하고 겸손한 데로 내려가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당신의 무한한 은총으로 참 평화와 자유와 행복과 새로운 생명을 주시어, 당신의 힘으로 우리를 몸소 들어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하여 들어 높여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들어 높여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우리가 비천하고 보잘 것 없고 미련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보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요.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께 우리의 참 행복과 자유와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완전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잘못된 욕심과 이기심을 비우고 사랑으로 겸손하게 낮은 데로 내려가면, 하느님께 참으로 인정받고 너무나 기특하고 사랑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들어 높여져서, 그분께서 주시는 참 행복과 평화와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 즉 복음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낮은 데로 내려가면 하느님으로부터 들어 높여지는 지극히 역설적인 신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것이 잘 나타납니다. 곧,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몸을 굽히시어 낮은 자세로 세례를 받으신 다음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하늘로부터 비둘기 모양의 성령을 보내주시고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인정해주시고 드높여 주셨습니다(마르 1,9-11 참조). 지극히 역설적이게도, 비천하고 겸손하게 낮은 데로 내려가는 자들을,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인정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드높여주시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적인 삶은 이렇듯 지극히 역설적인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여러분들은 일상의 삶에서 체험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웃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다가갈 때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그 신비를 이미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체험을 일상의 삶에서 더 확장시키고 더 강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매 순간 지극히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시며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특히 가난하고 비천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 이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지요. 그런 이웃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지극히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목적은 우리도 당신의 모습을 닮으라고 몸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으려는 우리는 하느님께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가며, 하느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습니까? 겸손하게 우리의 삶을 성찰해보며, 내일부터 시작되는 연중 시기를 새로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시작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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