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표징
나해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야고 1,1-11 복음 : 마르 8,11-13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표징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인지 아닌지 시험해보려고,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이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예수님의 선하신 뜻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이겠습니까?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요구했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란, 환시와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황홀하고 찬란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바리사이들이 생각하던 메시아는 엄청난 권능을 가지고 화려하고 찬란하게 기적을 베푸는, 그런 권위와 능력의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메시아의 내적으로 진실되고 거룩한 모습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모습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요. 이런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생각에는, 평소 그들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평소 그들의 삶이 내면의 모습보다는 겉모습에 치중된 삶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던 메시아의 모습도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곧, 바리사이들은 겉만 신경 쓰고 속은 돌보지 않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의인 행세를 하며 사람들로부터 메시아처럼 칭송받기를 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을 갈고 닦는 수행을 무척 게을리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공짜로 화려한 권력과 명예만을 누리려고 하였습니다(마태 23,1-12 참조).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삶의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고통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 변화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의 잘못된 악한 모습과 투쟁하는 고통이 필수적인데, 그들은 그 고통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고수하면서,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을 통한 내면의 회개를 거부하였습니다. 내면이 변화되는 데 따르는 고통이 두려워서 그들이 의지하였던 것은, 우리 내면 깊숙이 찾아오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권력과 명예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선하신 뜻과는 역행하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역겨운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오히려, 사랑의 힘으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의 힘으로 온갖 고통을 이겨내는 내적인 삶 그 자체였습니다. 이는 사랑의 힘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잘못된 모습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삶이며, 사랑의 힘으로 온갖 고통을 감수하며 이웃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가장 커다란 표징이, 바로 저 십자가 표징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표징이 바로 하늘에서 오는 화려한 표징이 아니라, 수고하고 피땀 흘리는 우리의 내적인 삶 그 자체인, 저 십자가 표징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신자 분과 “이상하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일을 잘 시키시는 것 같다”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나약한 모습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하느님께서 정말 그런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라면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제1독서 야고보서 말씀처럼, 우리가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야고 1,2-4 참조),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즉,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의 영적인 성장, 곧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부활에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의 힘으로 걷는 길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차츰차츰 쉬워지고 나중에는 너무나 쉽고 가볍게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 십자가를 지고, 계속해서 참 생명을 주는 부활을 깊이깊이 체험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어둠에서 빛으로 차츰 차츰 옮겨가기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매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에서 부활의 기쁨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지고 가느냐, 아니면 그 십자가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십자가를 회피하고 쾌락에 의지하여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 자신의 잘못된 점들을 고치는 회개의 고통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명예와 물질 등이 주는 쾌락에 의지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길과는 역행하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당장은 쉽고 편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악한 모습들 때문에, 분명히 고통 받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 안의 어두움과 적극적으로 싸우는 영적 투쟁을 게을리 하면,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어두움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지요.
오늘 제1독서 야고보서에서 십자가를 대하는 우리들의 올바른 자세가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야고 1,2) 그 시련이 다시없는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시련을 통하여 인내가 생기고 그 인내는 우리를 성장시켜서 부활의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야고 1,2-4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매 순간의 삶에서 찾아오는 십자가를 과연 어떠한 자세로 대하고 있는지, 조용히 침묵 가운데 우리의 삶을 성찰해 보도록 합시다.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1656 |
천사와의 만남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3.19 | 추천 0 | 조회 172 |
하느님의 사랑 | 2025.03.19 | 0 | 172 |
1655 |
듣고 믿어서 회개함 – 사순 제1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3.12 | 추천 0 | 조회 242 |
하느님의 사랑 | 2025.03.12 | 0 | 242 |
1654 |
먼지로 돌아감 – 재의 수요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3.05 | 추천 0 | 조회 283 |
하느님의 사랑 | 2025.03.05 | 0 | 283 |
1653 |
새로운 복음의 방향 – 연중 제7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2.26 | 추천 0 | 조회 437 |
하느님의 사랑 | 2025.02.26 | 0 | 437 |
1652 |
청원 기도 – 연중 제6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2.19 | 추천 0 | 조회 435 |
하느님의 사랑 | 2025.02.19 | 0 | 435 |
1651 |
나쁜 생각을 물리치려면 – 연중 제5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2.12 | 추천 0 | 조회 661 |
하느님의 사랑 | 2025.02.12 | 0 | 661 |
1650 |
시련의 의미 –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2.05 | 추천 0 | 조회 823 |
하느님의 사랑 | 2025.02.05 | 0 | 823 |
1649 |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이야기하였다 – 연중 제1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1.15 | 추천 0 | 조회 1414 |
하느님의 사랑 | 2025.01.15 | 0 | 1414 |
1648 |
말씀이 이루어졌다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1.09 | 추천 0 | 조회 1803 |
하느님의 사랑 | 2025.01.09 | 0 | 1803 |
1647 |
곰곰이 되새겼다 –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하느님의 사랑
| 2025.01.01 | 추천 0 | 조회 2680 |
하느님의 사랑 | 2025.01.01 | 0 | 26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