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그리스도 문화, 십자가 문화, 파스카적 사랑의 문화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제1독서 : 사도 1,15-17; 20-26 복음 : 요한 15,9-17
그리스도 문화, 십자가 문화, 파스카적 사랑의 문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강조하시며, 우리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상하 관계로서 수직적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리나, 얼굴을 마주보며 서로 거리낌 없이 사랑을 나누는, 수평적 관계로 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우리나라에는 종이라는 신분이 없어졌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뿌리 깊은 유교문화 아래에서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했었습니다. 양반과 상놈 간의 차별이 무척 심했었고, 특히 노비는 양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며,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매매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불평등한 수직적 구조 안에서 천주교가 전해졌지요. 아마도 사랑을 강조하며 모두 똑같이 형제, 자매라고 불러주는 평등 정신에 매료되어, 천주교에 입교한 신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꾸준히 키워나가서, 그 평등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러한 신앙 선조들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현대의 한국 교회는 성직자 중심주의로 인해서 수직적 구조가 뚜렷한데다, 성직자들과 중산층 신자들이 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교회가 중산층화되어, 가난한 신자들이 소외받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에서 정말 이러한 현상이 심하다면 큰 문제입니다. 다함께 반성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불평등한 수직적인 구조 안에서는, 권력이나 물질로 다른 사람들을 억누르려고 하기 쉽고, 그렇게 억눌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 때문에, 이웃들에게 마음을 잘 열지 못하고 다가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서로 사랑을 잘 나눌 수 없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처럼 종이 아니라 평등한 친구로서 이웃들을 대하면, 서로 거리낌 없이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서, 서로 사랑을 시원, 시원하게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신 이유를, 하느님 아버지께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모두 알려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와 같이 수평적인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야지,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우리에게 모두 알려 주실 수 있고, 우리도 그 허물없는 관계 안에서 그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억누르는 삶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희생과 봉사의 삶이지요. 예수님께서 몸소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권위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항해서, 그리고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는 제자들 앞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45 참조)고, 얼마나 자주 강조하셨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사회 구조가 계급적, 수직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큰소리치며 살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만큼은 거기에 빠져서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세속문화에 죽고, “그리스도 문화”에,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로마 6,4; 갈라 3,27 참조). 갈라티아서 3장 28절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조금 바꿔서 말하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선배도 후배도, 상사도 말단 직원도 구별 없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그런 “그리스도 문화”는 바로, 바오로 사도께서 필리피서 2장에서 말씀하시듯이,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면서,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겸손한 마음으로 사는 문화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신을 비우고 낮춰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순종하는 문화입니다(필리 2,1-11 참조)! 곧,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는 “십자가 문화”, “파스카적 사랑의 문화”입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남들을 억누르면서 사는 문화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건네주는 문화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사랑으로 친구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는 문화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직자든 평신도든, 아무런 구분과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떼인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모든 이의 종이 되시어, 당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오늘 축일을 맞는 마티아 사도도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그리스도를 따라서, 이웃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놓는 순교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또는 가정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가족구성원으로서 어떻게 가족들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이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직장과 성당 단체들과 각종 모임 안에서, 온갖 감투를 쓰고 살아가면서, 어떻게 동료, 이웃들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곰곰이 돌이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약한 우리들은 세속문화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적, 문화적 기준으로 서로를 심판하고 억누르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듯이, 우리를 심판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고 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 사랑의 관계, 그 사랑의 계명이 우리 삶의, 단 하나의 완전한 기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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