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2018년 3월 3일 사순 2주간 토요일
찬미예수님!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깊이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통해 그 잘못들을 용서 받습니다.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의 제 성사생활, 특히 고해성사 생활을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건성으로 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한 일을 찾는 과정, 다시 말해 통회는 열심히 했습니다. 잘못한 일을 찾아서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해소 안에 들어가서 고해 신부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마음먹은 대로 말하기 보다는 조금 돌려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에 포함시켜 성사를 보기도 했습니다. 고해소 안에서, 고해 신부님도, 저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기는 하지만 왠지 신부님은 저의 목소리만 들어도 제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고, 저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죄를 있는 그대로 또 생각한대로 말하게 되면 신부님이 저를 다르게 보실 것 같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본 날에는 결정적으로 제가 고백한 내용이 강론의 주제나 소재가 되는 때도 있어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곤궁에 허덕이며 찾은 것은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돼지가 먹는 열매 꼬투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사람들은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돼지는 하느님의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 혹은 그 이방인들이 사는 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작은 아들이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으려 하는 모습은 그의 허기짐과 목마름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하느님을 찾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보다 외적이고 표면적인 해결만을 바라는 모습입니다. 또한 이는 속죄와 회개의 시간인 사순시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받는 고해성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그저 부활 전에 치러야만 하는 하나의 숙제처럼 생각하고, 판공성사표를 내기 위한 일종의 행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는 조금 돌려 말해도 괜찮겠지..’ 또는 ‘이 이야기는 깊게 하지 말아야 겠다.’라고 고해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고, 또 합리화하는 모습과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돼지가 먹는 열매 꼬투리로 배를 채우려 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이렇게 말하겠다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 돌아가서 그가 마음속으로 다짐한 말을 똑같이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으며 예수님처럼 살아보겠다고 그분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에게 있어 그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고백의 내용을 떠나서, 내가 뉘우친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 나를 보다 자유롭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우리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늘 잘못을 범하고, 또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언제든지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올 기회를 열어 두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사실 교회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불미스러운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어려움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외적인 요인에서 오는 어려움이라기보다는 각자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데서 어려움입니다. 나의 편의를 더 생각하기 때문이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반겨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원수들, 특히 자기 자신이라는 원수를 이겨내고 하느님께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가 마음을 돌리기도 전에 우리를 반겨주십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간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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