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2018년 3월 17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김성 세자요한
20180317 사순 제 4주간 토요일(요한 7, 40-53)
찬미 예수님!
1900년대 서울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아직 한국인 신부가 많지 않았던 때라 명동성당에는 프랑스인이 주임신부로 있었습니다.
때는 부활을 앞둔 판공시기였습니다. 한 꼬마가 고해소에 들어와서 죄를 고백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우리 엄마가 구들장 내려앉는다고 방에서는 뛰지도 말고
특히 물구나무는 절대 서지 말라고 하셨는데, 엄마 몰래 여러 번 물구나무를 섰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세 번 했습니다.”
꼬마의 고백을 듣고 난 프랑스인 신부가 물었습니다.
“뭇쓴(무슨) 나무라고 하셨습니까?”
“물구나무입니다.”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프랑스인 신부가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온돌방에 뭇쓴 나무?”
이에 꼬마가 제안했습니다.
“신부님 고해소 안에서는 물구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밖에 나가서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이리하여 프랑스인 신부는 고해를 주다 말고 고해소의 커튼을 열어젖히고, 아이는 고해소 앞에서 물구나무를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신부님이 한 마디 했습니다.
“그게 나무냐?”
“예, 신부님! 이게 물구나무라고 하는 겁니다!”
판공성사를 보려고 기다리던 수많은 교우들은 이 광경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꼬마 다음에 고해소로 들어온 중년부인이 신부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 신부님, 저는 죄를 많이 지었지만 나이도 많고 몸도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니 요 앞의 애처럼 물구나무 서라는 보속을 주실까봐 겁납니다.
그런 보속은 안주신다고 먼저 약속해 주세요!”
우리가 늘 주의하고 조심해야 하는 개가 두 마리 있습니다. 바로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개입니다.
오늘도 군중들은 설왕설래 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누구인가? 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참 예언자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메시아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합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위하여 변론하자 바리사이들은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라고 단언합니다.
프레임 효과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있습니다. 어떤 틀 안에서 보면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선입견이나 편견을 해석해 주는 용어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가 의사나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면 그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그 사람 자체보다는 의사나 변호사라는 틀 안에서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은 당시에 예수님을 깔보고 무시하게 하는 첫 번째 요소였습니다. 보잘 것 없던 지방이었던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목수라는 프레임은 그분의 기적과 이적, 권위 있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폄하하는 주된 논리였습니다.
심지어는 그분의 기적을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모함하기도 합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오늘 독서의 예레미아 예언자는 의인이, 예언자가 당하는 고통과 모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도 의인들, 예언자들은 이러한 모함과 박해를 받습니다. 진실과 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쩌면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상주의라고 비판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도 그러한 생각에 젖어있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지요. 분명 현실에 발을 굳건히 디뎌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조차 참과 선과 아름다움 보다 이익과 효용과 편법을 선호한다면, 이 세상의 법칙에 우선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늘‘아직’에 머물 것입니다. 이미 왔고 주님께서 확연하게 가르쳐주신 그 나라를 우리는 살아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사는 것이
참 행복임을 우리가 먼저 느껴야하고, 그렇게 살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만이 참 행복이고, 참 기준이고, 마지막 보루임을 우리는 분명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께 돌아가고 그분께 의지하고 의탁하고, 청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분만이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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