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2018년 3월 18일 사순 제 5주일 – 김성 세자요한
20180318 사순 제 5주일(요한 12, 20-33)
찬미 예수님!
어느 시골 본당에서 고해자가 워낙 많아 근처에 사는 은퇴 신부를 모셔와 고해성사를 주고 있었습니다. 노신부의 한 가지 단점은 가는귀가 먹어서 잘 듣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말로 죄를 고백하지 않고 종이에 적어 그 쪽지를 고해소 문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년의 자매님이 고해신부에게 죄 목록을 내밀었는데 10초도 안되어 되돌려 받았습니다.
쪽지를 받아든 그 자매님은 얼굴이 벌개 진 채 고해소를 빠져 나왔습니다.
종이 앞면에는
‘갈비 2Kg, 주물럭 2Kg, 돼지목살 1,5Kg, 삼겹살 2Kg 종이 뒷면에는
‘배추 1포기, 상추, 마늘, 참기름, 설탕 1Kg’이 적혀있는 게 아닙니까?
성당에 오기 전 들른 가게에서 주인에게 ‘장바구니 목록 표’를 건네준다는 것이 그만 ‘고해쪽지’와 뒤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아주머니는 두 번 다시 그 가게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리스인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러한 신념으로 살아간 선현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근대에 있어서는 독립 운동가들이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고, 우리 신앙에 있어서는 선조 순교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분들의 삶을 살펴보면 참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을 봅니다. 분명히 더 큰 가치와 숭고한 이념을 위해서 편안하고 쉬운 길을 포기하고 그 길을 갔지만 그 끝이 아름답지만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이 친일파의 후손들에게 거의 두 세기에 가깝게 박해당하고 모욕당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선조 순교자들, 그중에서도 양반 가문의 몰락.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정씨 일가와 권일신, 권철신 형제 집안, 유항검 등의 초기 교회를 일구고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불씨를 지폈던 분들이 그 가문에서 박해 받고 가족들은 유배되는, 특히 어린 자녀들이 관노로 끌려가고 여자들은 관비가 되어 처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과거를 돌아보면 참 안타깝고 가슴 저리기만 합니다.
독립 운동가들과 선조 순교자들에게는 만약 내세가 없고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그건 정말로 안타깝고 땅을 칠 일을 것입니다. 의인의 고통과 악인의 승리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로 하느님을 부정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예로부터 아니 어느 민족 어느 종교에서나 있는 의인의 고통과 악인의 승리에 대한 심판의 개념. 그것이 바로 사후의 재판이며, 그 주재자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이 현세의 삶이 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이 옳다면 아니 옳을 수는 없고, 그 주장이 먹히고 그런 생각들이 일반화된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정글의 법칙, 약육강식의 세계로 전락하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차별하고 종처럼 다루는 일이 일상이 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재로 세계 도처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현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기 희생과 헌신의 가치는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 그 기쁜 소식의 알파와 오메가는 물론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 언급되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밀알이 썩어 더 많은 열매을 맺듯이 이러한 자기 희생, 그리고 자기 헌신은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사람에게 감명을 통해서 깨달음과 확신을 줍니다.
또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명처럼. 우리는 그분이 가르치신 핵심 개념인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다시 상기해야만 합니다.
그 가르침은 친교의 삶이요, 친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종교를 불문하고 신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라도 믿는 이들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어둠의 작용은 “신이 없다. 이 세상의 삶만이, 이 유한한 삶만이 전부다.”라고 계속 속삭입니다. 여기에서 이기심과 편법을 동원한 이익추구가 첨가되며, 결국 같은 인간을 수단화하고 대상화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는 극악한 범죄도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참 무서운 일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교육공무원이 국민은 개돼지라는 망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발언에 국민들은 분노하여 일어섰지만 일각에서는 이러한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이는 이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 다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작은 예이지만 정말 악한 이들도 존재합니다. 어둠속의 어둠 같은 이들은 겉만 포장한 짐승과 사탄과 다름없는 이들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한 바탕에는 신에 대한 불신앙이 깔려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왜곡된 신앙되 참 위험하기는 하지요.
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흔들고 있는 미투 운동도 저는 이러한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약자인 여성을 대상화하고, 욕망의 수단으로만 삼으려는, 무엇보다 폭력과 위압에 의한 행동은 참 부끄럽기만한 일일 것입니다.
가치가 가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정의와 공정, 사랑과 희생이 그 자체로 당연하다는 확신. 그러한 행동에 대한 굳건한 보상 즉 심판에 대한 믿음. 아니 그냥 그러한 삶이 옳고 맞다라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교리 체계에 의한 학습의 결과뿐 아니라,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신에 대한 동경과 깨달음, 그리고 체험에 의한 확신으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난해한 교리 지식이 없을지라도 촌부들과 시골 아낙네들의 품성과 삶은 하느님 나라, 그분의 다스림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네 시골의 공동체적 삶은 친교와 나눔, 정과 배려.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보다 수도원보다도 시골의 작은 마을의 인심과 나눔과 친교가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깝울 수도 있을 겁니다.
주님이 보여준 삶은 하느님의 자비, 그분이 바로 사랑의 아버지 라는 사실. 또한 그 성부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라도 가치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명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의 세상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믿음을 견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소하게나마 내가 관계하는 인연을 소중히 하고,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공정과 사랑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친교의 공동체에만이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고, 그러한 친교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분의 제자인 수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성자의 고통과 수난과 죽음이 선뜻 납득되기는 어렵지만 사랑이며 선이시고 절대 가치인 성부의 뜻이고 의지이며 명령이 자명하기에 성자도 기꺼이 순종하신 것이지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참으로 어렵다고 느낍니다.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박해와 고문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을 달리해 보면, 나의 의지로는 불가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용기를 내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어쩌면 친교의 공동체 우리나라 정서로 정이나 의리, 더 확대한다면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좀 힘들 것 같지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가능할 것 같은 그런 마음.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성찰하는 데 도움이 좀 되실겁니다.
오늘 1독서의 다음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미약한 나의 의지와 참 고치기 힘든 나쁜 습관들을 돌아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만, 이 또한 내 의지나 능력만으로는 고치기 힘듬을 알기에 주님의 은총과 그분의 손길에 의탁합니다. 때가 되어 성령의 손길이 내 마음에 닿도록, 조금만 그 신성의 불꽃이 옮겨오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그것이 위안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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