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2018년 5월 20일 성령강림대축일 -김성 세자요한
20180520 성령강림대축일(요한 20, 19-23)
찬미 예수님!
누구나 ‘웨딩 사진’은 아름답고 멋있는 모습으로 찍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턱시도를 입은 채 강물로 뛰어든 예비신랑이 있었습니다. 2017년 9월 23일(현지시각) 캐나다 키치너 빅토리아 공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날 예비신랑 클래이턴(Clayton)과 예비신부 브리타니(Brittany)는 웨딩 촬영에 한창이었습니다.
공동 촬영을 끝내고 브리타니의 독사진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클래이턴은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갔는데, 한 소년이 연못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연못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무사히 구해냈죠.
예비신부는 웨딩사진 촬영 중 갑자기 예비신랑이 턱시도를 입은 채 연못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사진사 대런은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채 아이를 강둑 위로 올려주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대런은 “오늘 내가 찍은 가장 특별한 사진”이라고 SNS에 남겼습니다. 이어서 “턱시도를 벗는 것도 깜빡 잊은 채 강에 뛰어들어 작은 생명을 구해낸 신랑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클래이턴 덕분에 무사히 연못 밖으로 나온 아이는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잠시 후 보호자가 도착했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클래이턴은 “물에서 나오기 위해 허우적대는 아이를 보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며 “턱시도가 젖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 했다. 예비신부에게 미안하다”고 전했습니다.
턱시도가 흠뻑 젖은 채 아이를 구하는 사진을 본 누리꾼들은
“진심 훈훈하다, 아내가 부럽다. 좋은 남편이 될 듯, 천사가 따로 없다는 등” 예비 신랑의 인성을 칭찬하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이 예비신랑에게서 성령의 움직임을 보셨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뭉클하였습니다.
성령에 대해서 교회에서는 어떻게 말하는 지 성경에서부터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에 대하여 사용한 단어는 고유한 형태가 아닌 바람[風] 또는 숨, 입김[氣息]을 뜻하는 Ruah(히브리어), Pneuma(그리스어), Spiritus(라틴어) 등의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① 야훼의 영 : Ruah의 첫째 뜻은 바람입니다. 바람은 구약에서 자주 하느님 야훼의 현존(現存)을 표시합니다(창세 3:8). 바람은 하느님의 창조하시는 기운이요(창세 1:2, 시편 33:6), 하느님의 능력의 도구로서(2사무 22:16, 민수 11:31)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저항을 분쇄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Ruah는 또 야훼의 입김이며, 만물은 이 입김으로 생명을 받습니다. 유다인들은 역사 안에 일어나는 모든 간섭은 야훼의 영이 한 일이라고 봅니다.
② 예수와 성령 : 신약에서 언급한 하느님의 영도 그 전부가 바로 명시적으로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구약과의 연결성으로 보아 하느님의 힘이라고 볼 것이지만, 몇몇 텍스트는 명백히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성령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부의 선언이 있었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셨고(마태 4:1), 악령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풀어주셨고(마태 12:28),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루가 4:18). 항상 성령으로 가득한 예수는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예외적 현상 없이 일상사처럼 기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요한 16:13-15). 이 점이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자들과 다른 점이고 이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각합니다.
예수는 당신과 함께 하시는 성령을 제자들에게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신 뒤에는(요한 17:12) 성령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요한 14:16, 16:7), 박해 시에는 물론이고(마르 13:11, 마태 10:20) 세속과의 일상적 투쟁 속에서도 함께 계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요한 14:16)
③ 성령과 초대 교회 : 초대 교회의 모습을 증언하는 사도행전은 성령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령의 임재(臨在, assistentia)와 역사하심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강림을 받은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용감히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사도 2:1-14). 그들의 설교는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으며(사도 2:2), 그들의 지혜와 언변은 당대의 학자들을 침묵시켰습니다(사도 4:13-14, 6:10).
성령에 의하여 사도로 불렸음을 확신하는 바오로는(2고린 3:2-3) 성령의 지시대로 움직이고(사도 20:22-24) 그 지령대로 설교합니다(1고린 2:3-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그는 이야기 합니다.(로마 8:1 · 5 · 9)
2. 성령에 관한 교의사 : 초대 교회의 신경에도 분명히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위격으로 고백하고 있는데, 이 신앙교리를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세월이 필요하였습니다.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년)는 단순히 “성령을 믿는다“고 결의했으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는 니체아 신경에 “또한 주님이시며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유출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성령“을 믿는다고 결의하여 성령의 신성과 그 위격과 성부 · 성자와의 관계를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의를 해석하는데, 동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유출하신다고 이해하였고,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유출하신다고 이해하였으며,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675년에 브라가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를 삽입했고, 뒤에 로마에서도 이 삽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동방교회는 서방교회가 일방적으로 신조(信條)를 변경하였다고 공박하였고, 오늘까지 양 교회 간에 분쟁거리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필리오퀘 논쟁인데, 이는 쉽게 이해하자면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서 나오는 것이라면 성자가 없던 시대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 시대에는 성령이 없었나? 라는 것이 동방의 주장입니다. 또한 서방의 성자에게서의 삽입은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의 후계자 로마 교황의 수위권 문제와 겹쳐져서 결국 동서방의 분열을 가져오게 됩니다.
성령은 성자의 강생에 즈음하여 처음부터 예수의 인간성을 축성하셨고(루가 4:18), 이렇게 성령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인간 구원의 도구가 되셨고 그로 말미암아 즉, 우리 인간성이 축성된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도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합체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신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에 의하여 살아 있듯이 교회도 성령에 의하여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헌장은 “동일한 성령이 교회의 머리(그리스도)와 그 지체에 계시어 몸 전체를 생활케 하시고 통일하시고 움직이신다. 그래서 교부들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생명의 원리 즉 영혼이 육체 안에서 하는 일과 비교할 수 있었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7항).
또한 성령은 신자 개인을 성화시킬 뿐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 성덕의 향기를 계속 뿜어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는 간단한 결론에 만족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교회의 근원은 성삼의 신비 안에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 안에 항상 계심으로써 교회는 신앙의 유산을 간직하고 실천하며 모든 믿는 이들을 하나의 백성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시대나 환경에 따라서 필요한 제도나 운동을 신설하거나 변경하거나 폐지하는 모든 사목활동에 성령께서는 항상 함께하시어 크게 그르치지 않게 보호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령에 대한 믿음이고 교회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함께 숨을 불어 넣어주신 그 성령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신적인 용어이지만 인간인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성령이 그 신성이 우리 안에 있기에 가능합니다. 인간이란 존재 안에서 육의 힘은 용서보다는 복수에 집중하고, 사랑하기보다 폭력과 속박에 치중합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는 어둠이 찾아올 것입니다. 불을 끄면 어둠이 찾아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그러한 마음이 들게 하고, 우리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이끄는 역동이 성령과 합치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하고, 애원해야하고 무엇보다 집중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움직이시도록 청원하고 허락해야합니다. 그리한다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온 그 일치와 자유와 해방의 영이 우리를 복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분 성령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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