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2018년 7월 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 김성 세자요한
2018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마태 13, 36-43)
찬미 예수님!
군대 종교 시간에 군종법사가 스님이 되고 싶다는 신병에게 물었습니다.
군종법사 : 자네 이름이 뭔가?
신병 : 김요셉입니다.
군종법사 : 왜 그런 이름을 지었나?
신병 : 어머니께서 독실한 크리스찬이십니다.
군종법사 : 어머니 성함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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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 : 김보살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이름의 뜻은 ‘타는 불’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갈 길 잃은 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고,
냉담한 마음속에 열정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냐시오의 생애를 상징하는 표어를 말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루가 12, 49)’ 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을 ‘예수회’라는 독특한 방식의 수도회를 창설하여,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수회는 세계 도처에 270여 대학을 세우고, 영신 수련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인 영성 수련 방법을 제시하였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복음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예수회는 수도회지만 공동생활을 지향하지 않고 개별 사도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방식은 개개인의 열정과 헌신을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회의 수련은 매우 깊이 있고, 엄격하기로 유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해석해 주십니다. 이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비슷한 경향으로 많이 드러납니다.
우선 교회를 예로 든다고 해도, 교회 안에는 선인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의 기운을 품고 있는 이들, 또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취에 빠져서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치인들 중에서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복음과 거리가 먼, 특히 사회 교리와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을 보면 ‘참 저들을 종교를 그저 간판으로 내세우는 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이렇게 현실 안에서도 뒤섞여 있지만 사실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아도 그러합니다. 저는 이 마음 안에 있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묵상과 성찰, 그리고 지향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마음에는 기쁨과 슬픔, 좋은 추억과 상처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좋지 않은 기억이나 상처, 그리고 화나 짜증, 미움 등의 감정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꼭꼭 눌러서 마음의 서랍 속에 넣어두거나, 아니면 포장지로 몇 겹으로 싸서 보여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뽑아버리거나 태워 없애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선 마음은 내가 맘대로 조종할 수 없으며, 사실 마음이 나를 조종합니다. 마음 속에 화나 상처는 이해해 주고 달래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감정을 부정한다고 해도 그 감정은 끝까지 남아서 소리를 지르고 가끔 폭풍처럼 휘몰아칩니다.
그때가 되기 전에는 밀과 가라지를 함께 두어야 하는 것처럼, 맘속에 상처와 화도 가만히 두면서 달래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직면하기 싫은 그 어둠과 질식할 듯이 깊어지는 우울이나 화는 사실 싸인이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말하고자하는 징표입니다. 그 화의 근원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서일 수 있고, 그 짜증의 이유는 불합리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습니다. 그 미움은 공정과 공평이 어긋한 표시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대인배라고 믿고 싶지만 사실 준만큼 받지 못하면 섭섭함에 속된 말로 꼬라지가 납니다.
그래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선 달래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징징대는 이유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진짜 속상할 때, 누군가 특히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이가 ‘아 그랬구나. 얼마나 힘들었니. 내가 함께 해 줄게.’ 라는 말 한마디가 눈물 나도록 고맙듯이. 우리도 스스로에게 그렇게 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우리가 묵상해 보아야할 주제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지금은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주님을 대면할 그 날이 오면, 우리 마음속에 부정과 어둠은 눈처럼 희고 살처럼 부드럽게 바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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