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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생명에의 여정
그리스도 생명에의 여정(기쁨과 희망 2010, 11월 원고) 2012, 11, 19.
양운기/ 한국순교복자 수도회
1)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 마석 모란공원이라 불리는 공원묘지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불온한 사람들, 한 시대를 불온한 몸과 마음, 불온한 생각으로 불온한 행동을 했던, 그래서 보통의 삶을 살수 없었던 사람들이 민주열사묘역을 이루어 도란도란 묻혀있습니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한 이후 한 생을 바쳐 시대를 불온하게 살았던 영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른 것입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투라의 입을 빌려 ‘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너무나 늦고, 소수의 사람들 죽음은 너무나 이르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를 포함하여 짧은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됩니다. 어디 예수뿐이겠습니까? 민주열사묘역에 잠들어있는, 그러나 눈을 감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올 가을 무거운 가슴을 털어내고 싶어서, 어떤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의 투명함을 찾을 수 없어서, 제 삶에 나타나는 벽의 정체와 대화하고 싶어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을 몇 차례 찾았습니다. 그때마다 민주열사묘역에서 자주 단순 명쾌한 답을 얻었던 기억 때문입니다. 언제나처럼 묘역은 지난 역사를 가슴에 품은 채 적막에 쌓여 가을을 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민주열사묘역을 몇 바퀴 돌아보며 함께 세상을, 역사를 말했던 친구와, 선배, 살아있을 때 그토록 가슴으로 만났던 몇몇 얼굴들과 상봉 하는 찰나 아! 문득 지난 5년간 민주열사묘역을 찾는 사람들이 흘렸을 눈물이 떠올랐습니다. 순간 제 가슴의 무거운 벽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5년간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묻히는 모습이 연상되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별해야 했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영정을 들고, 시신을 등에 메고, 땅에 묻고, 흙을 덮고, 비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마무리하던-. 그 모든 절차들이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 이후 오늘날 까지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은 수많은 죽음을 가슴에 품어야 했으며 2007년 12월 이명박 권력이 시작된 이후 5년 동안도 변함없이, 아직은 더 살아야 할 사람들을 슬픔으로 품어야만 했습니다. 역사의 격랑 앞에 민주열사묘역은 지난 5년도 단절 없이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음이 기막힌 현실이었습니다. 내일은 누가 이 묘역의 품에 안길 것인가? 모레는 누가?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민주열사묘역의 비애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명박 권력이 청와대를 장악한 후 서민들의 생활환경은 이미 열악한 상황에서 더욱 어려운 환경으로 치달았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합니다. 2008년 봄에 백성들의 요청을 거부한 권력에 항의하는 거대한 촛불저항이 있어도 권력은 일방적 독주를 거듭하며 소통불능이었습니다. 이런 소통불능은 지리산 향악단에서, 계룡산 중악단, 묘향산 상악단까지 수경, 문규현, 전종훈, 세 성직자의 오체투지를 요구했습니다. 어쩌면 이명박 정권이 기지개를 켰을 때 오체투지는 예견된 일인지 모릅니다.
2)
문득 지난 5년, 역사가 거꾸로 가 버렸다는 5년간 민주열사묘역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 공원 입구에부터 다시 들어갔습니다. 민주열사 묘역을 진입하면 조영래 변호사의 자리를 지나 바로 왼쪽 편에 묵직한 쇠뭉치가 다섯 열사의 형상으로 쇳물을 흘리며 버티고 있습니다. 탐욕스런 살인적 개발 앞에 인간 공동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망루에 올랐던 윤용헌, 이성수, 한대성, 양회성, 이상림님, 5명의 철거민들입니다. 개인적인 삶을 살지 않고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이분들은 개발을 빙자한 약탈에 저항하다가 재벌과 국가의 폭력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분들의 저항은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며 개인의 영달만을 목적으로 살아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이명박 정권 시작 후 처음으로 열사묘역의 품에 안긴 분들입니다. 2009년 1월 20일 화마에 휩싸이고 2010년 1월 9일에 장례식을 했으니 딱 355일 만입니다. 당시 72세였던(아! 72세의 노인마저 망루에 올라야 하는 야만의 시대입니다) 이상림 열사는 2009년 1월 20일 망루에 오를 때 용산구청에서 받은 공문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품이 되어버린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용산 참사 희생자 故 이상림님의 망루 유품 중, 용산구청의 질의 회신 공문>
“세입자 보상 계획에 대한 협의가 없다고 해서 관리 처분 계획 인가 등을 중단할 수 없는 사항임을 회신하오니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산구청장” 법에 따라서 관계인의 보상 협의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기에 협의를 마칠 때까지 ‘관리 처분 계획 인가(철거 직전의 마지막 인가 단계를 말한다)를 보류해 달라’는 고인의 민원에 대한 회신 공문입니다. 용산구청은 ‘관리 처분 계획 인가를 중단할 수 없다’며 거절을 통보한 것입니다. 30여년을 용산구의 주민으로 살았던 그의 최후의 절박한 요구마저 거절당한, 그 구청 공문을 가슴에 품고 막내아들과 함께 꼭대기 망루에 올랐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절을 통보받았던 그의 요구를, 2010년 11월, 서울고등법원은 절차상 중대한 위반이 있었다며 “용산4구역 관리 처분 계획 무효”라고 판결했습니다. 고인은 도심의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이미 대지와 한 몸이 되었고 그의 아들 이충연(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님은 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차디찬 감방에 갇혀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야만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계신 곳의 반대쪽 언덕에는 이명박 정권에서 두 번째 모란공원에 합류한 양갑세 열사가 있습니다. 2010년, 12월 29일 영면. 사무연대노조 정릉신협지부 노조 지부장으로 서울 정릉동에 있는 자택에서 자결하였습니다. 수개월 동안 자행된 노골적인 노조탄압과 비상식적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기획 감사와 세무조사. 새로이 조합에 가입한 조합원에 대한 해고 협박, 이처럼 비열하고 치졸한 노조 탄압이 양갑세 열사에게는 또 다른 감옥이었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정릉신협 사측은 지부 설립부터 줄곧 정당한 노조활동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2008년에는 파출수납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를 불법 해고하고 직원들에 대한 일상적인 해고 협박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꽃다운 아내와 세 살, 두 달된 아이들을 남겨두고 동지들 곁에 삶의 짐을 내려놓았으나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가슴은 텅 비었을 것입니다. 그의 빗돌에는 ‘중소 영세 비정규직과 신협 노동자 조직화에 헌신하다가 생을 마감하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민주열사묘역에 합류한 김주현, 그는 용산참사 희생자들과 같은 언덕에 있었습니다. 2011년, 1월 11일 새벽 천안 삼성전자에서 LCD(액정화면) 공장 기숙사 13층에서 화학물질 중독과 업무 스트레스에 힘겨워 투신자결을 감행합니다. 노동자 김주현 열사, 그의 주검은 장례를 늦추면서 삼성의 부조리를 고발했고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소리 없는 죽음을 맞는 노동자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 후 열사들 곁에서 한줄기 바람맞으며 고이 쉬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삼성에 근무하면 출세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했던 저 자신부터 죄인’이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삼성이 말하는 초일류 기업에 속아 살아온 것입니다. ‘노동부와 경찰, 삼성은 잘 맺어진 협력업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서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삼성은 김주현 열사가 투신할 때 기록이 담긴 사내 CCTV 일부를 유가족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삼성 측이 경찰에 제공한 CCTV가 원본이 아닌 편집 본으로 확인 되면서 그의 아버지가 알게 된 초 일류기업 삼성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난 것입니다. 김주현 열사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 후 97일 만에 열사들 곁에 묻었으나 사실은 자신의 가슴에 묻은 것입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과 김주현 열사의 가운데를 차지한 주인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소속, 1988년 5월 26일 행방불명 후 2011년 5월 29일, 23년이 지나도록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주검 없는 텅 빈 관으로 초혼 장을 치룬 안치웅 열사였습니다. 그가 이명박 정권에서 네 번째로 민주열사묘역에 합류한 것입니다. 송경동 시인의 목소리가 빗돌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찾고 있다. 당신을/ 당신의 영민했던 의식을/ 당신의 소박한 웃음을/ 감옥에 갇혀서도 굴하지 않았던 용기를/ 당신이 꿈꾸었던 민족해방 노동해방의 꿈을/ 죽이지 않고서는 빼앗을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향한 당신의 긍지와 신념을’ 송 시인이 바친 시의 서문입니다.
송 시인이 바친 긴 시의 시작은 분노와 격정, 애타는 그리움이 절절하게 녹아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찾고 있다. 당신을/ 당신을 미행했던 검은 그림자들을/ 소리 죽인 발걸음들과 엿듣는 귀들을/ 그 독재의 말초신경들과 압제의 끄나풀들을/ 우리는 아직도 찾고 있다. 당신을/ 당신을 끌고 갔던 1988년 5월 26일 그 초여름의 햇살을.’ 그리고 다음처럼 끝을 맺습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때야 우리 젊은 당신을/ 우리 가슴 속에 묻으리니/ 살아 있으라. 청년이여!/ 살아 있으라. 열사여’ 정신이 멍멍 해 지고 가슴이 아파 묘 앞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열사묘역에 묻힌, 아!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그는 사실상 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의 배후입니다. 청년 전태일의 유언, “내가 못 다한 일, 어머니가 꼭 이뤄주소. 내가 죽고 없으면 엄마가 댕기면서,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단결해서 싸워야한다고. 그렇게 외쳐 주소” 라고 했던, 그 부탁을 가슴에 품고 살다가 2011년, 9월 3일 새벽 눈을 감았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 전태일과, 박용길, 조영래와 함께 밤이면 무덤 밖으로 나와 훨훨 춤추고 귀신놀이 하면서 이명박을 꾸짖고 있을 것입니다. 새벽에 그가 영면에 든 날 밤, 노동자들의 외침을 외면하던 이명박은 잠실야구장에서 그의 가족들과 키스 쇼를 벌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정보를 미리 듣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그것만큼은 볼 수 없다고 서둘러 눈을 감으셨나요? 귀천하기 얼마 전 그는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40년 동안 갈 데 안 갈 데 다 다녔는데 변한 게 없어서, 우리 아들한테 가서 할 말이 없어서 큰 일인기라.’ 그를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는 아들 전태일이 잠든 곳에서 오른쪽 뒤편 4시 반 방향에 작은 빗돌 옆에 누워 은은한 저녁노을을 맞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빗돌에는 신영복 선생께서 어머니의 생전의 말씀을 새겨놓았습니다. ‘하나가 되어서 싸우세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못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일이 엄마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여러분이 꼭 이루어 주소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0절에서 아버지에게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이소선 어머니와 예수님은 닮은꼴이었습니다.
이소선 여사의 오른쪽 편 언덕길을 따라 위로 오르면 통일할머니 박용길 장로가 먼저 자리 잡은 그의 남편이자 평생 동지인 문익환 목사님과 함께 누웠습니다. 할머니는 2011년, 9월, 25일에 영면에 들어 그토록 그리던 늦봄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토록 벗 삼았던 이소선 여사가 귀천한 후 스무이틀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늦봄이 보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이소선 여사가 보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이참에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지내려고 민주열사묘역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을까요? 작은 빗돌에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길에 함께한 평생의 반려자요 동지인 늦봄 문익환 목사 곁에 나란히 눕다’고 적혀있습니다. 늦봄 문익환, 봄길 박용길 두 분의 삶은 우리나라의 근대사이며 현대사이고 민족운동의 축소판입니다. 두 분을 설명하는 단어는 ‘꿈과 덤’이라고 합니다. 두 분은 늘 현실을 넘어 큰 꿈을 꾸고 자신들의 삶을 하늘이 덤으로 주신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예속과 분단, 전쟁과 독재, 오욕으로 점철된 이 땅을 동지 삼아 모진 탄압에 저항하며 최후까지 민족의 손과 발이 되어 자신을 다 바쳤습니다. 참 신앙인입니다. 그는 이명박 정권에서 여섯 번째로 열사묘역에 합류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2 디모테오 4, 7).’
이춘자, 아! 내 친구 이춘자는 영등포 노동광장에서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월간 노동세상의 살림을 뒷감당하며 살다가 작년 12월, 17일에 허망하게 귀천하고 일곱 번째로 민주열사묘역에 묻혔습니다. 20대부터 지금까지 그의 삶은 노동자와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낮은 곳에서 자신을 태웠습니다. 그의 배우자이며 평생 동지였던 박세길과 가족들, 그가 가꾸어오던 노동광장에서 노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주열사묘역으로 삶을 옮겼습니다. 태풍이 그렇게 몰아치는 작년 8월 제주 강정에서 저와 함께 일주일을 보내며 해군기지 앞에서 주저앉아 부당한 권력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월간 노동세상 52호(2011년, 9월치)에 강정특집을 실었습니다. 거기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구럼비 바다의 평화를 빼앗지 말라’고. 그리고 ‘24시간 풀가동되는 과로사회 한국’을 기사화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슬픔에 찬 세상을 찾아다니다 자신은 정작 과로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 그의 남편 박세길은 눈을 부릅뜨고 ‘과로사회’인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동지 이춘자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열사묘역을 진입하면 오른쪽 언덕 편 낮은 곳에, 그의 평소처럼 낮은 곳에 누워 이승의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덟 번째로 민주열사 묘역에 잠든 사람은 김근태입니다. 2011년, 12월, 30일 새벽, 그렇게 보고 싶은 정권교체를 보지 못하고 동지들 옆에 있겠다며 민주열사들의 품에 안긴 민주주의자입니다. 국립현충원으로 가기를 권유 받았으나 그에게는 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이 국립 현충원이며 그곳의 동지들이 애국지사들이기에 한마디로 거절하고 이춘자의 왼쪽 위편에, 이춘자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쉬고 있습니다. 1985년 9월 민청련 초대 의장으로 남영동 대공 분실에 끌려가 20여 일간 매일 5시간씩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한 후유증은 끝내 그를 병마에서 놔주질 않았습니다.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은 ‘80년대 심문은 예술이었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어서인지 김근태는 긴 시간을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2005년 어느 날, 수감 중인 이근안을 면회합니다. 용서를 비는 이근안에게 그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시대가 낳은 비극이다’라고 답하며 용서를 했으나 면회를 갔다 온 후에도 ‘그가 나에게 한 사죄가 진심일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근안을 만나야 하는가를 두고 깊은 고민을 한 것이나 이근안이 청하는 용서의 진심을 의심했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마지막까지 의심할 만큼 그가 당했던 고문이 처절했음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근태는 끝내 ‘지금의 마음으로는 다 지나가고 싶다, 정말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인이며 신사입니다. 누가 다녀갔는지 ‘당신이 옳았습니다!’ 라는 리본이 달린 꽃바구니가 성모상과 함께 처연하게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벤치에 있는 방문객이 놓고 간 모자를 집어 성모님께 씌워 드렸더니 성모님과 김근태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없이 깊고 넓은 가슴의 김근태와 성모님의 마음은 그 크기가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 열사묘역에 묻힌 선경식, 2012년, 4월, 27일 귀천. 열사묘역에 합류한지 5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 그의 빗돌은 빛이 바래지 않아 깨끗한 채 있었습니다. 1975년 6월 유신헌법을 반대하다 서울구치소로 끌려가 ‘유신 재판에 참여할 수 없다’며 재판을 거부하고 7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재판거부는 항소도 거부하는 것’이라며 끝내 4년 6개월의 형을 살다가 박정희가 죽고 나서야 석방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항소하면 형기가 단축되는 판결을 받는데도 끝내 거부한 것입니다. 1982년 이후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여 삼성과 특수 관계에 있는 중앙일보가 노동조합을 허용할 수 없다는 반발을 뚫고 노동조합의 깃발을 세우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언론 민주화의 역사에는 그의 이름이 반드시 등장한다고 할 만큼 언론 민주화 운동에 온몸을 바친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빗돌에는 ‘언론인, 민주주의자, 좌우명;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옥살이와 고문의 후유증은 뛰어넘을 수 없어서 올 봄에 그리던 동지들이 잠들어있는 열사묘역에 합류한 것입니다. 청년 전태일이 그를 아우처럼 내려다보며 ‘이제 왔느냐?’고 말하면 들릴 수 있는 아래쪽에 동생처럼 묻혀있었습니다.
지난 5년, 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은 이처럼 많은 사람을 품고 있었습니다. 제가 확인하지 못한 다른 주검도 있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잔인한 5년입니다.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는 주검들 이외에 2009년부터 시작된 쌍용자동차의 노동자와 그 가족 23명, 그들은 어디에 묻혀있을까요? 아, 2010년, 5월 31일 이명박 정권에게 ‘4대강 사업을 중단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경북 군위 하천에서 소신공양으로 홀로 자신을 태운 문수스님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계실까요? 권력은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이, 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이 얼마나 더 많은 죽음으로 채워져야 폭력의 질주를 멈출 것인가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3)
방 한 칸을 원했더니 죽어 묻힐 땅 한 평도 돌려주지 않은 세상입니다. 인간의 목숨이 끊겨도 355일, 97일이 지나야만 땅에 묻힐 수 있는 세상입니다. 노동자는 계속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삶을 연명해야 하는 세상, 주검도 없는 텅 비어있는 관으로 23년 만에 장례를 지내야 하는 세상입니다. 죽기 전의 절박한 호소가 도심의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가족들이 다 해체되고 땅에 묻힌 후에 진위가 밝혀지는 세상,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시 개발을 밀어붙이는 세상, 가해자들은 여전히 주인 노릇하며 또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저항하는 철거민으로 내몰고 있는 세상입니다. 해군기지 건설은 인간 존엄과 민주적 절차를 지키면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항의하면 수감자가 되는 세상, 평화를, 생명을 우선하라고 외치면 법정에 서야 하고, 환경은 후대에게 미리 빌려 쓰는 것이므로 환경파괴를 막으려는 행동을 하면 범법자가 되어 처벌을 받는 세상입니다.
묘역을 내려오는 길, 저는 민주열사묘역을 예수님께서 장엄한 죽음을 맞이했던 골고타 언덕으로 이해했습니다. 열사묘역에 묻힌 영혼들이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더 불온해야한다’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온함이 모자라서 세상이 꿈쩍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 불온하고 또 불온해야만, 계속 불온해야만 다음에 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을 찾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을 품은 대지는 말이 없고 가을하늘은 정처 없이 높습니다. 환장하도록 붉디붉은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 붉은 단풍들이 열사들의 흘렸던 피로 보이는 것은 차라리 고문이며 형벌입니다.
갑자기 시인 도종환이 단재 신채호의 무덤에서 썼다는 ‘앉은뱅이 민들레’라는 시 한편이 스쳐갑니다. 아니 도종환의 시가 아니라 민주열사묘역의 열사들이 간절한 요청이며, 준엄한 명령으로 들립니다. “나 죽은 뒤/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을 벗었거든/ 내 무덤가에 와서 놀아라/ 새떼처럼 하얗게 아이들 데리고 와/ 웃으며 손뼉 치며 놀아라. 나 죽은 뒤/ 아직도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로 그늘져 흐리거든/ 내 무덤가에 오지 말아라/ 돌아가 피 흘리며 싸워라”
4)
대한문 앞 10시 반 방향에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이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기본권도 지켜주지 않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늦은 밤 불 밝혀 무엇 하는지 궁금합니다. 국가인권위 건물을 밝히는 불빛은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그 가족들 23명의 생명이 희생되어 밝히는 불빛입니다. 대한문 정면 12시 방향의 재능교육 건물의 위용은 수많은 학습지 교사들의 피와 땀, 눈물의 대가입니다. 시청 맞은편 프라자 호텔의 높이는 울산 현대 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절규하는 50m 송전탑 높이와 맞먹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고공 송전탑 농성보다 비정규직으로 사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입니다.
새로 지어진 서울시청 건물의 유리가 고압적으로 반짝일 때의 모습과 MBC KBS YTN등이 앵무새처럼 권력의 목소리만 전달할 때의 TV모니터 모습은 영락없는 일란성 쌍둥입니다. 월요일 저녁 대한문 앞 미사 시간에 스쳐가는 바람소리는 실 날 같은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콜트 콜텍 노동자들이 눈물로 만든 희망의 기타 소리입니다. 시청 앞을 가로질러 달리는 자동차의 질주 소리는 4대강에서 죽어간 수많은 생명체들의 아우성이며 아직도 고용불안에 노출되어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불안한 심장 박동 소리입니다.
시청 앞 서울 광장을 화려하게 비추는 불빛은 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에 묻힌 열사들의 혼 불이 광장에 내려온 것입니다. 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이 서울광장에 오버랩 되면서 광장은 민주열사묘역이 됩니다. 열사들의 혼 불과 서울광장의 불빛이 하나가 되며 열사들이 줄지어 서울광장, 대한문 앞으로 걸어옵니다. 대한문 앞 기도회에 자신들도 참여 하겠노라고, 그래서 꼭 민주를, 생명을, 인권을, 평화를,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합니다. 열사들의 염원은 저 멀리 강정마을까지, 강정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투쟁중인 활동가들의 가슴에 스며듭니다. 수감 중인 활동가들과 이영찬 신부의 감방에까지 찾아 들어 갑니다.
혼 불은 세상과 우리들에게 호소합니다. 불온했던 민주열사들을 기억해 달라고, 계속 불온하지 않으면 모란공원의 민주열사묘역이 계속 차고 넘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온하지 않으면 슬픈 역사는 계속 될 것이라고, 민주정부 세워 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을 더 이상 주검으로 채우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박정희는 두 개의 이름을 가면처럼 쓰고서 세상을 농락했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오카모토 미노루’나 ‘다카키 마사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 이름이 계속 오르내리면 독재는 다시 시작된다고, 그와 박근혜는 초록이 동색이라고 말합니다.
독재자 김일성의 손자가 북을 통치하고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남을 통치하는, 독재자의 핏줄들이 다시 권력을 잡는, 그래서 우리민족이 온 세계에 웃음거리가 되고 망신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온했던 열사들의 혼 불이 가을 밤바람에 흔들리며 열사묘역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고 대한문 앞에 주저 않았습니다.
5)
대한민국헌법은 그 전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 19 민주 이념을 계승 한다’고 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등장한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을 선포한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절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박근혜는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며 ‘5.16과 유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5. 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까지 했습니다. 헌법 전문의 내용을 역사에 맡긴다면 헌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헌법에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한다는 말이 없으며, 1961년, 5월, 16일의 군사반란을 혁명으로 인정하거나 계승한다는 말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말하는 대한민국은 헌법에 없습니다. 헌법은 그 전문에서 분명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 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과연 우리에게 국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헌법을 부정하고 헌법이 말하는 국가를 부정하는 경거망동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명박과 박근혜는 한솥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이 현실화 된다면 헌법이 말하는 대한민국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헌법에 말하는 국가는 없고 오로지 추악한 권력의 음모가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서민들의 구멍가게 상권까지 약탈하는 재벌과, 앵무새가 되어 부당한 권력의 메신저가 된 수구 언론이 힘을 모아 골프장을 만들고 핵발전소를 설계하고 약자들의 공존을 위협하며 미래의 불행을 잉태하는 음흉한 권력만이 있습니다. 헌법과 국가, 국민은 없으며 정체불명의 국가관으로 평화를 위협하고 생명을 죽이는 무리들만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
6)
대한민국 헌법은 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밝히며 2조 2항에서는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고 밝힙니다. 헌법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 이름은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입니다. 그가 서울 2000년 서울시장으로 출마할 때 자신의 출생지를 경북이라고 속였으나 2007년에 대통령에 출마할 즈음 밝혀진 출생지는 ‘일본 오사카’였습니다. 이때 밝혀진 이름이 스키야마 아키히로 입니다. 2008년 초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기자가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대해 논의했느냐고 묻자 이대통령은 ‘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하자 부시 대통령은 화가 난 얼굴로 곧바로 ‘논의했다.’라고 반박했습니다. 사실 확인을 한 결과 실제로 그때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논의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주권자인 국민을 속이려다 다시 들통 난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태도들은 이명박 정권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반증합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입니다. 심부름꾼이 이곳저곳에서 국민을 속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국민을 보호할 의무’는커녕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국민의 존엄과 가치’를 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05년에는 국회가 이미 합의한 ‘행정중심 복합도시’ 안을 군대라도 동원해 막고 싶다는 발언을 하며 국민의 위에 자신이 있다는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청와대의 주인이 된 후에는 촛불 집회에 1만 명이 참석했다는 보고를 받고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 고 하여 국민들의 소비 형태까지 자신이 제한할 수 있다는 발칙한 생각을 드러냅니다.
2007년 대운하 공약이 나왔을 당시 국민의 혈세 한 푼 안들이고 민간자본을 유치하겠다고 강조했으나 대운하 공약이 4대강 사업으로 바뀌면서 세금 22조원을 쏟아 부었습니다. 과연 22조원만 투입되었을까요? 그리고 이 후 관리비용은 수 천 억 원 이상 투입되지 않을까요? 정권 인수 초기시절 이명박은 권위주의적인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청와대의 봉황무늬를 폐지한다고 했으나 아직 여러 곳에 봉황무늬는 눈에 띱니다. 처음부터 끝가지 속임수로 시작해서 들통 나는 것으로 일관되어왔습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면, 많은 주권자인 국민이 반대하는 허무맹랑한 4대강 사업을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안다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죽음에 책임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김정우 지부장은 ‘23명을 죽였으니 더 이상 죽이지 말라’는 요구를 하면서 자신은 곡기를 끊은 채 단식에 들어 간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죽음을 각오하면서 자신은 더 이상 죽이지 말라는 요구를 하는 나라가 우리 말고 과연 세상에 있을까요?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인 나라, 가까스로 1위가 아니라 OECD 평균 자살률의 3배가 넘는 1위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는 헌법 2조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2646명중 국회의원이나 장관의 가족이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경제가 어렵고 상황이 어렵다고 하면서 해결책을 뒤로 미룰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보호되는 국민은 없고 수백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현실입니다. 헌법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생존의 어려움을 겪는 90%의 백성들은 재벌이 저지르고 토해놓은 찌꺼기를 해결하느라 등골이 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명박 권력 아래서는 헌법이 말하는 국민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이명박의 명령만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강산을 모두 집어 삼키려는 모리배들만 있을 뿐입니다.
7)
대한민국헌법은 5조 1항에서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예비군 안보교육에서 공군 장성 출신 강사가 85명의 예비군이 모인데서 ‘우리도 다른 나라 식민지 좀 만들자. 영국, 스페인도 다 외국을 지배했는데 왜 우리는 못 하느냐’며 ‘최첨단 무기를 병사들에게 쥐여 주고 지휘관이 정신 차리면 우리도 다른 나라 침략해서 식민지 좀 만들고 못할 것이 뭐가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고 하면 왜 다들 거부반응을 일으키느냐’며 ‘고구려 선조들처럼 (우리도)중국을 침략해 지배하고 일본도 침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은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발언이며 침략전쟁을 위한 군사력 증대 주장입이다. 군사통지의 잔재이며 군사력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국제적 폭력입니다. 이는 안보가 아니라 파멸입니다.
이 강사가 속한 단체가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국발협)입니다. 국발협은 2010년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민간인 시절 주도해서 설립한 안보교육 단체입니다. 2011년 1323차례에 걸쳐 예비군 동원훈련에 안보교육 강사를 무료로 지원했고, 2012년에는 국방부로부터 2억2000여만 원을 받아 1272차례의 예비군 동원훈련 안보강의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2004년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육군중장)을 끝으로 박근혜가 대표시절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국제위원회 부위원장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해 2월 이명박 대통령이 그를 국가보훈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국발협은 지난 6월 법제처가 주관한 국제 행사장에 2015년 12월로 예정된 전시작전권 전환을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린 ‘전시작전통제권 바로 알기’라는 책자를 대량 배포했습니다. 그 내용은 ‘전시작전권이 전환되면 한, 미 연합사령부가 해체되고 한, 미 연합사령부가 해체되면 주한미군이 철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우리 정부 국방정책 기조와 반대됩니다. 국방부 관계자는 ‘전시작전권은 2015년 말까지 미군에서 넘겨받는다는 게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작년 12월 박 처장은 광복회 워크숍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 정도로 살게 된 것은 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입니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누구를 뽑아야 할지 다들 아시겠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국가가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국민입니까? 우리는 언제 국가를, 헌법을 돌려받을 수 있으며 국민의 지위를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지난 5년, 우리 헌법은 부정당했고 헌정을 유린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5년 헌법이 말하는 국가를 볼 수 없었고 헌법이 말하는 국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난 5년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는 국가와 국민을 없앴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의 딸이 그 뒤를 이어 받으려고 권력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가 누구입니까? 박정희의 일본이름입니다.
8)
시나리오가 눈에 들어옵니다. 박근혜는 박승춘을 여당에 입당시켜 국제위원회 부위원장의 역할을 맡기고 이명박은 박승춘을 국가 보훈처장으로 발탁합니다. 박승춘은 박정희를 찬양하며 대통령 선거에 개입합니다. 그는 군 출신 고위공직자입니다. 그가 박근혜 – 이명박 – 박근혜를 연결하는 고리입니다. 그가 만든 안보 교육단체는 헌법을 부인하고, 정부의 국방정책을 부인하고 대통령 선거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근혜를 통해 박정희를 부활시키면 이명박과 그는 임무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즉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의 임무는 박근혜를 통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를 부활시키는 것이며 일본이 부활 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박승춘이 맡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완성되면 우리는 다시 100년 전처럼 일본의 손아귀에 있게 됩니다. 온 몸에 전율이 일고 등골이 오싹합니다. 아! 이것을 모란공원의 민주열사들이 알고 있어서 시청 앞 대한문을 떠나지 않고 혼 불로 주저 않은 것입니다.
9)
사람들은 박정희가 두 개의 일본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위키 백과사전은 다음처럼 적고 있습니다. 군관시절 박정희는 스스로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일본어: 岡本實)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창씨개명을 하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 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라고 서술하였다.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었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만주 군관학교나 관동군은 모두 일본군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실 일제 말엽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박정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 이름을 응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 씨에서 따온 것이며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창씨 개명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그러듯 창씨개명에는 조선인의 뿌리가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두 번째로 개명한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입니다. 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 이름으로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 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로서 그는 완전한 ‘황국신민’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언론인 고종석은 히스토리아 333쪽에서 “장준하는 생전에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셋 있는데, 첫째는 오카모토 미노루, 둘째는 다카키 마사오, 셋째는 박정희’라고 말한 바 있다. 세 사람은 동일인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 장준하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면 장준하가 박정희의 행적을 정확히 알고 있어서, 그래서 박정희는 불안해서 장준하를 죽여야만 했을 것입니다.
한편 위키 백과사전은 다음처럼 기록을 덧 붙입니다.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의 1939년 3월 31일자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 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혈서에 대해 보도한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혈서로 쓴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또한 동봉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만주국의 군관이란 만주에서 활동하는 일본군을 말합니다. 이로서 오카모토 미노루는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고 혈서까지 쓴 유일한 조선인이 되었습니다.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군관학교 1등으로 졸업하면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공개된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오카모토 미노루’가 군관학교 졸업 후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110 여회에 걸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인 간도(연변) 특설대 에 소속되어 항일 독립군을 탄압하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이 패망하자 그는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위장, 광복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신출귀몰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좌익 계열 활동을 하던 ‘오카모토 미노루’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고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강탈한 ‘오카모토 미노루’는 대통령의 위치에서 일본과 굴욕 외교를 맺고 맙니다. 과연 박정희의 정체는 뭘까요? 박근혜는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 했다’ 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봐 노심초사 했던 것이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수많은 민주 인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박정희가 활약했던 간도특설대에 대하여 위키 백과사전은 다음처럼 설명합니다. 만주국(일본당국)이 동북항일연군, 팔로군(중국 국민혁명군)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하여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명 규모의 대대급 특수부대였다. 간도특설대는 당시, 간도에서 조선 독립군과 중국인이 연계한 반일-반만주국 투쟁(대표적인 조직은 중국 공산당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다. 만주국의 참의원을 지낸 친일파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명칭도 이에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만주에 있는 일본군)에 소속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여 이 땅에서 사라져 우리 민족이 일제의 구속이나 억압에서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해방되었고 독립되었을까요?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가 18년 5개월 동안 군사독재정치로 이 땅을 지배하고 그가 키웠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12년 5개월을 군사독재정치로 지배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거쳐 다시 이명박(쓰키야마 아키히로)이 5년의 먹통정치로 대한민국을 절망으로 밀어 넣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카모토 미노루’의 딸이 이 땅을 지배하려고 국가 최고 권력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일본에서 완전하게 해방되었다고, 독립되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단재 신채호의 무덤에서 썼다는 시인 도종환의 시가 머리를 맴돕니다. 도종환은 신채호를 과거의 사람으로 보지 않고 현재의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채호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고, 민주열사묘역에의 열사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 죽은 뒤/ 아직도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로 그늘져 흐리거든/ 내 무덤가에 오지 말아라/ 돌아가 피 흘리며 싸워라”
10)
사실 모란공원의 민주열사묘역은 1970년 청년 전태일이 묻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오카모토 미노루(박정희)’의 군사독재정치가 온 나라의 숨통을 조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이명박 권력이 재벌들과 힘을 합쳐 힘없는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야만의 시대, 폭력의 시대는 아직까지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글을 쓰는데 콜트 콜텍 노동조합 위원장 방종운 형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아내에게 무언가 희망의 소리를 말하고 싶어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이 복직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잘 되었네’를 연발하면서, ‘환자를 돌보아서 잘 아는데 환자 가족들이 더 고생 많다’면서 ‘싸우는 당사자는 억울하고 잘못되었으니까 싸운다 하지만 가족들은 무슨 고생이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내의 기쁜 표정을 보면서 내친김에 ‘콜트, 콜텍도 한진중공업처럼 잘 될 거라’고 말을 해봅니다. 어쩌면 저의 바람이 될 줄 모르지만. 긴 세월동안 지켜 보아온 아내는 ‘거기는 큰 회사니까 복직 됐지. 콜트는 작은 회사에다 사장도 꼴통이고 방종운도 꼴통인데 쉽게 되겠냐?’고 답답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가족은 내가 지키니까 걱정 말아요.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뭘 못 기다리겠나’ 고 하면서.”
아! 가슴이 먹먹합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우여곡절 끝에 복직 되었다는 뉴스를 종운 형은 형수님에게 말 했는가 봅니다. 형수님은 간병 요양사를 하면서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간 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면 남편에게 꼴통이라고 표현할까요? 그러나 꼴통이란 표현은 지난 6년간의 부당해고 철회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끈기와 결기를 표현한 다른 말일 겁니다. 그런데 종운 형의 딸 민주는 미술공부를 포기해서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이메일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아직 끝이 아니야. 나는 싸우고 있잖아! 넋두리인줄 몰라도 아내의 말을 들었지, 가족은 아내가 책임지고 있다고, 가족의 힘이 있기에 저는 아직도 이 싸움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종운 형을 마지막 만난 것은 3년 전 쯤, 어느 날 이총각 누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양수사 방종운하고 할 예기가 있는데 시간 좀 내봐.’ 그렇게 해서 10여년 만에 종운 형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부산 한진중공업을 향해 희망버스가 오고 갈 때 부산역에서, 비오는 날 ‘일하고 싶다’는 피켓을 들고 서 있는 형을 멀리서 봤습니다. 멀리 있어서 가까이 가질 못했습니다. 저는 제 일만 하느라고 바쁜척하고 사는데, 형은 지금껏 공장에서 악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것도 힘겨운데 콜트, 콜텍 부당해고에 저항하느라 몸과 마음이 매우 지쳐있었습니다. 이총각 누님은 그를 격려하려고 저를 불러 함께 식사했습니다. 이총각 누님은 아직도 앓는 후배들, 우는 후배들을 만져주며 뒷감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종운형은 이총각 누님을 ‘루시아 누나’라고 부릅니다.
1978년 동일방직 노동조합위원장 이총각, 2012년 콜트악기 노동조합 지부장 방종운, 시대는 다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노동을 숙명으로 알고 있는, 그래서 가난이 숙명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식사는 함께 했지만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냥저냥 대충 밥을 먹고 일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처연한 잿빛이었습니다. 집에 와서 그냥 쓰러졌습니다. 노여움과 슬픔에 너무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 후 형은 계속 이메일로 공장의 상황을 알려줍니다.
사실 종운 형이 지고 책임진 삶의 무게는 자신과 부당 해고된 노동자들까지 삶을 회복해야하는 일입니다. 저는 솔직히 이렇게 오래 견딜 줄 몰랐습니다. 콜트, 콜텍 경영자가 고약하기로 이름나 있으며 이명박이 기업 프렌들리 정신으로 노동자들을 때려잡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부도, 법원도 정당한 역할을 하지 않고 기업 프렌들리를 소리치는 이명박 눈치만 보기 때문에 얼마가질 못하고 무너질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저는 노동자 방종운을 몰랐던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아쉬움 없이 따뜻하게 살아가는데 가난한 방종운을 아는 것이 이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종운 형은 국제 연대를 성사 시키는 등 문제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데 혼신의 힘을 다 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실을 알리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던 것입니다. 형수님의 말대로 ‘꼴통’이어서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꼴통은 끈기, 성실, 책임감, 정의와 단호함 등, 매우 가치 있는 삶을 표현하는 살아있는 언어입니다.
희망)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 하느님은 전면에 나서는 방법으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애타는 부탁은 오히려 절망으로 돌아왔습니다. 골고타 예수님의 처절한 절규에도 하느님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깊은 침묵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부재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왜? 하느님은 나타나지 않은가?’를 묻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청원을 지금 나에게 행동하라는 요청으로 알아듣는 것입니다.
방종운의 6년의 저항에 하느님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자들의 몫을 통해 하느님은 전면에 나타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움직임 안에서만 하느님은 응답합니다. 하느님 부재의 의심을 넘어서고 하느님 존재가 확인되는 방법은 살아있는 자들이 움직일 때, 그 때, 하느님도 살아 움직이며 존재함을 응답합니다. 그 때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행동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산자들의 몫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며, 그것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찾아 나서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제가 믿는 하느님은 이렇습니다.
방종운은 아직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방종운은 단 한 사람의 방종운이 아닙니다. 방종운은 지금 시대의 가난한 모든 사람의 이름입니다. 방종운은 모든 해고당한 모든 사람의 상징이며 비정규직의 모습입니다. 방종운은 차별받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며 약탈하는 기업들에 맞서는 약자들의 얼굴입니다. 생존권과 인간 존엄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모든 백성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방종운은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서민들의 목소리입니다. 방종운은 빼앗기고 울부짖는 철거민들의 모습이며, 해군기지 앞에서 저항하는 활동가들의 몸입니다. 방종운은 비인간적인 양극화에 신음하는 무지렁이들의 눈물입니다. 방종운은 무차별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 쓰러져 울고 있는 상처입니다. 방종운은 우리 자신입니다. 방종운은 4대강에서, 핵 발전과 송전탑에서, 핍박받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체의 총체입니다. 아! 방종운은 복음이 말하는 고아이며 과부이며 나그네입니다.
방종운이 책임을 완수 할 수 있는 길은 그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몫입니다. 방종운이 책임을 다 한다는 것은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로부터 박근혜로 넘어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일입니다. 방종운이 책임을 다 한다는 것은 박근혜를 통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의 부활을 막고 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의 열사들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방종운이 책임을 다 한다는 것은 일본의 부활을 막는 일입니다. 방종운이 책임을 다 한다는 것은 죽어가는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길입니다. 방종운이 책임을 다 한다는 것은 우리가 행동함으로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행동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에의 여정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도종환의 입을 빌어 신채호가 말합니다. “나 죽은 뒤/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을 벗었거든/ 내 무덤가에 와서 놀아라/ 새떼처럼 하얗게 아이들 데리고 와/ 웃으며 손뼉 치며 놀아라. 나 죽은 뒤/ 아직도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로 그늘져 흐리거든/ 내 무덤가에 오지 말아라/ 돌아가 피 흘리며 싸워라”
시청 앞 열사들의 혼 불이 밤비에 젖습니다. 펄럭이는 혼 불들이 신채호와 함께 부활합니다. 방종운이 모든 생명체와 함께 부활하는 혼 불을 배웅합니다. 아! 밝은 새벽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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