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
로마 11,1ㄴ-2r.1-12.25-29
루카 14,1.7-11
†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평상시와 좀 다른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 받은 사람들, 즉 도움을 주어야만 할 처지의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서 함께 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바리사이 사람, 그것도 지도자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고르며 서로 밀어내고 밀치며 자리다툼하는 것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쩌면 잘난 척 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마다 겸손하지 못한 채, 윗자리를 고르며 자리다툼을 하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예화가 생각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맹사성이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19세에 장원 급제를 하고 20세에는 경기도 파주의 군수가 된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를 하여 그 자긍심이 하늘을 찌를 듯 하였습니다. 파주 군수로 가 있던 어느 날 맹사성은 한 고승을 찾아가서 “스님, 제가 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어떤 덕목을 최고로 삼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스님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십시오.”라고 어렵지 않은 듯 막힘없이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에 맹사성은 “그런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인데 이렇게 먼 길을 온 저에게 그 말밖에는 할 것이 없으십니까?”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화를 냈습니다. 그 말에 대꾸가 없던 스님이 차 한 잔하고 갈 것을 권하자 맹사성은 마지못해 다시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찻잔에 차를 따르던 스님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찻물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넘친 찻물로 방바닥이 금방 흥건해졌습니다. 화가 난 맹사성은 스님을 노려보며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것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찻물이 넘쳐서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서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그리 모르십니까?” 맹사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시뻘게지자, 그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려다가 그만 방문에 머리를 찧고 말았습니다. 그 때 스님이 또 한 마디 조용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머리를 숙이면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최근 저는 많은 이들과 대립하고 부딪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를 타인의 잘못으로 여기고, 저 자신은 옳고 정당하다고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의 잘못과 실수를 바라보지 못한 채, 건방지게도 꼿꼿이 머리를 세우고 상대방에게 숙일 것을 요구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부딪히고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저 자신을 겸손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과 사람들이 저를 힘들게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머리를 조금만 숙여도 조금만 겸손해도 삶이 힘들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저 자신은 지혜롭고 잘났다고 생각하지만, 매우 어리석은 자 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아주 간단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와 함께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을 보고 있으면, 지식이 넘치고 재물이 쌓이는데 그것을 자랑하려 들면 교만해지고 고약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예화의 고승처럼 겸손해지고 낮추는 사람일수록 덕망이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크게 만드는 것은 있는 것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가슴에 담고 살 때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의 겸손하게 살라는 예수의 말씀은 너무나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겸손하게 살고, 나보다 못한 사람과도 함께 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삶이야말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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