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빵의 선택

작성자
수도회

작성일
2012-04-24 10:25

조회
3680

 

빵의 선택

 

1. 요한 복음 6장, ‘빵에 관한 이야기’

저번 주부터 우리는 미사 중에 요한 복음 6장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6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빵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매우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마주대하는 군중의 반응이 180도 바뀌는 것입니다.

 

 

2. 군중의 변화

요한 복음 6장의 시작은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군중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모실려고 합니다. 그것을 아는 예수님은 군중을 떠나시지만, 군중은 밤새워 예수님을 찾아 다닙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다시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에 관한 기적’ 대신 ‘빵에 관한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끝났을 때, 군중은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라고 이야기했던 군중은 기껏해야 요셉의 아들인 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가하며 냉소하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여 예수님을 떠납니다.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왕과 예언자라고 칭송하던 군중과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제자들마저 듣기가 거북하여 참을 수 없게 만든 이 말씀이 어제부터 이번 주 토요일까지 복음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내일 마르코 축일 제외) 여러분도 이번주 복음을 잘 들어보시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참된 것(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적인 것.)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군중은 똑같이 빵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빵의 의미’에 있어서 예수님과 군중은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군중이 이야기하는 빵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먹었던 물질적인 빵입니다. 우리 육체에 양식이 되는 ‘먹을 것’을 의미합니다. 전날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서 군중이 먹었던 그 빵인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은 예수님께 믿기 위한 표징으로 그 빵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하고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을 먹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은근히 먹는 빵을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빵을 이야기하시며, 그 빵을 주실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빵은 군중이 이야기하는 빵과는 다릅니다. 그 빵은 예수님 자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군중은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렇기에 요한 복음 6장 마지막에 가서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이야기하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군중과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았기에, 예수님께서 군중이 요구하는 빵을 얼마든지, 충분히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그 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알고 있습니다. 그 빵을 주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예언자로, 임금으로 대접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군중과 수많은 제자가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을 알면서도 다른 빵을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왜 그런 것일까요?

 

물질적인 빵이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참된 빵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고, 요한 복음 6장 전체에서 참된 빵, 참된 생명, 참된 음료, 참된 양식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참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곧 참된 것은 영적인 것이며, 그 영적인 생명을 위해 우리가 얻어야 할 참된 양식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 곧 하느님이라는 것을 오늘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육적인 것은 쓸모가 없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먹을 물질적 빵이나 식량, 옷가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또 병자를 치유해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인간의 삶에서 질병의 치유와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수님도 알고 계십니다. 다만, 그러한 것이 영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 또는 우리가 베풀어주길 바라는 것이 훨씬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질병이나,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성당에 나가서 미사를 하거나,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아까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러한 것을 베풀어주지 않으실까 노심초사하고, 그러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적인 수단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마치 오늘의 군중처럼.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6장에서 군중이 모인 것은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고,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것들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이 세상의 일이 잘 해결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과 제자는 여기서 떠나갑니다.

 

 

4.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주역 중 우리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6장 말미에서 믿지 않는 이와 배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믿지 않는 이는 군중이요, 배반하는 사람은 유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철저히 갈라놓습니다. 곧, 예수님 당신보다 당신에게서 오는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완전히 떠난 줄 알았던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도 금전에 대한 생각이 가득찬 유다가 주인공이 되어서 돌아오는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입니다. 수난복음에서 유다와 군중은 예수님을 고난과 십자가의 길로 내몹니다. 수난복음은 유다가 금전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매수당한 군중이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 때문에 하느님을 팔아넘기고,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간 이후 그 때까지 금전을 찾고, 그것을 움켜쥐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예수님 당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군중이 됩니다.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더라도 최후의 순간에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복음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중과 유다는 복음서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들의 존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부활 체험 이전에 자신의 목숨을 끊고, 부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보이지 않습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저서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경험하는 첫번째 부르심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을 향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6장에서 제자들과 군중이 마주한 가운데 설파되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갈림길입니다. 절박하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내려놓을 것인가의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인지 이번 주 동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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